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요하라 가즈히로 (문단 편집) == 프로 데뷔 전 == ||[[파일:external/blog-imgs-36.fc2.com/image-10115189217-10076383374.jpg|width=100%]]|| || 친구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 이들은 'KK 콤비'로 불리며 고교야구를 제패하고 프로 무대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에서 [[오마주]]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 오사카 최고의 야구 명문교인 [[PL학원고등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4번을 맡았을 정도로 힘이 좋은 타자였다. 참고로 그가 고교 시절 기록한 통산 홈런 개수는 64개인데 그중에서 공식전에서 기록한 홈런은 48개,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에서 기록한 홈런은 무려 13개이다. 오사카 출생인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대부터 골수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으로 유명했었으며 야구를 시작한 것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동경 때문일 정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최전성기인 V9[* 1965~1973까지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이후, [[주니치 드래곤즈]]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밀려 2년 연속 우승을 놓치던 장면이 어린 기요하라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한신 타이거스팬이었고, 어머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이었다고 한다. 한신 팬과 요미우리 팬의 결혼이나 교제는 상상도 못할 정도라는 일본 야구팬들에겐 굉장히 신기한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기요하라는 어린 시절 요미우리가 이긴 날에는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고 잤고 한신이 이긴 날에는 한신의 유니폼을 입고 잤다고 한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할 때도 한신이 이긴 날에는 한신 모자, 요미우리가 이긴 날에는 요미우리 모자를 쓰고 등교했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며 [[오 사다하루]]의 활약과 V9로 대표되는 요미우리의 최전성기를 보면서 요미우리팬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교 졸업 후 그토록 열망하던 요미우리에서 드래프트 1위로 지명받지 못하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세이부 라이온즈]]에 지명되어 버렸다. 거기다 198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드래프트 1위 지명은 그와 오사카 PL학원의 동기이자 평생 친구였던 [[쿠와타 마스미]]. 운명의 장난도 이 이상이 없었다. 정확한 정황은 기요하라는 고교 시절 인터뷰 내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겠다는 뜻을 밝혀왔고 쿠와타는 "고교 시절 내내 어느 팀이 날 지명하든 난 무조건 [[와세다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대외적으로 말을 해 왔다. 그러므로 쿠와타를 지명해도 대학에 가버리면 1라운드 지명을 날려버리는 셈이다. 또한 당시 요미우리 감독 [[오 사다하루]]는 여러 인터뷰에서 쿠와타는 대학에 간다니 힘들고, 자신의 후계자인 거포 1루수로 기요하라를 지명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 그리하여 쿠와타는 와세다대학 입학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대학 야구부에서 쿠와타 입단 환영 행사를 준비 할 정도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역시 구와타가 아닌 기요하라의 부모님에게 접촉하여 지명의사를 피력했다. 그리고 드래프트 당일 무려 6개구단[* [[난카이 호크스]], [[긴테츠 버팔로즈]], [[닛폰햄 파이터즈]], [[한신 타이거스]], '''세이부 라이온즈''', [[주니치 드래곤즈]]가 기요하라를 1순위로 지명했다. 그리고 기요하라는 세이부行.]이 기요하라를 1순위에 지명했으나 요미우리는 기습적으로 쿠와타 마스미를 지명하여 단독으로 교섭권을 따냈다. 당연히 모두가 경악. 그러나 쿠와타는 여전히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날 지명한 건 감사하지만 난 와세다 대학에 가겠다"라고 얘기했고, 당연히 야구계는 요미우리가 지명권 하나 날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했다. 와세다대학은 쿠와타 환영회를 준비했지만... 정작 쿠와타는 환영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쿠와타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모두의 뒤통수를 갈겨놓은 것이다.''' 당시 여러 설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요미우리가 쿠와타와 물밑 교섭을 통해 대학에 간다는 말을 흘려 아무도 지명 못하게 막은 후 단독 기습 지명으로 교섭권을 획득했다는 설과 쿠와타는 정말 대학에 가려고 했으나 지명 후 계약금에 흔들려 입단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에서는 전자의 가능성을 높게 치고 있다. 사실 요미우리 입장에서도 기요하라가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3루수엔 입단 당시 입단 5년차로 리그 MVP까지 수상했던 [[하라 다쓰노리]]가 버티고 있었고, 1루에는 1984년에 32홈런을 때렸으며 매년 3할 언저리 타율과 20홈런 내외를 기록하면서 쇼맨십으로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나카하타 키요시]]가 있었다. 어쨌든 6개 구단에서 기요하라를 지명하였고, 일본프로야구 1차 지명은 모든 구단이 자유롭게 지명을 한 후 지명한 선수가 복수 구단과 겹칠 경우 제비뽑기를 하여 당첨된 팀이 선제 교섭권을 따내는 룰에 따라 기요하라는 복수의 구단에서 제비뽑기를 했고 세이부가 1차 교섭권을 갖게 되었다. 세이부와의 교섭에 안 나가려 하는걸, 모친의 거의 폭언에 가까운 설득(...)을 받고 프로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여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기요하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쿠와타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짐했다. 쿠와타에게도 원한이 있음을 피력한 것을 보면[* 이 당시 쿠와타의 요미우리 지명 소식에 격분한 기요하라가 쿠와타를 손 봐주겠다며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기요하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PL 학원 야구부 3학년 전원이 나서서 2시간 동안 배팅볼을 던져줬다는 [[썰]]이 있다.] 쿠와타와 요미우리의 물밑교섭론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구와타에 대한 경쟁심을 사그라들지 않아, 1988년 올스타전에서 쿠와타를 상대로 홈런 기록 및 199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쿠와타를 상대로 홈런 두 방을 연달아 때려내기도 했다. 이러한 과거가 있어서 [[1987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 맞붙었을 때, 세이부의 우승이 확정되기 직전인 6차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기요하라는 갑작스레 눈물을 흘렸다. 당시 중계를 보면 카메라맨의 당황가득한 카메라워크가 일품이다. 우승 직전 상황에서 일본 야구 중계는 보통 선수 한 명씩을 비추면서 우승 직전의 설렘과 긴장어린 표정을 찍는 것이 관행인데, 이걸 찍다가 갑자기 1루에서 기요하라가 울기 시작하니까 카메라를 1루로 돌리고 허둥지둥 한다. 2루수였던 [[츠지 하츠히코]]가 기요하라를 다독이는 장면도 나왔다. 아무래도 과거 요미우리에게 당했던 심적인 아픔이 컸을 터. 그 요미우리를 자신이 기어코 이기고 있다는 긍정의 감정과,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요미우리가 일본시리즈에서 패배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일종의 가해자가 되어버린 부정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눈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마운드에 있었던 투수 [[쿠도 키미야스]]가 회고하기를, 자신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어떤 세레머니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울고 있는 기요하라를 본 순간 어떻게든 1루수 쪽으로 타구가 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 아웃카운트는 중견수였던 [[아키야마 코지]]가 중견수 뜬공을 잡으며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참고로 쿠도는 요미우리에서 기요하라와 재회했다.] 고교 시절 "KK 콤비"라고 불린 키요하라와 쿠와타의 인기는 이미 고시엔 스타급을 넘어서서 당시 일본프로야구 최고 스타였던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넘어선 수준으로 일본 스포츠신문에 오치아이가 그 둘의 인기를 질투하는 인터뷰가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오치아이는 기요하라가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오자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해 거기서 은퇴했다.] 이후 기요하라와 쿠와타는 화해를 했지만, 서로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라이벌 의식만큼은 내려놓지 않았다. 하락세가 완연했던 쿠와타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하고 선수로 복귀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기요하라가 술자리에서 은퇴하겠다고 말을 했다가 번복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먼저 은퇴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를 의식했다. 결국 미국에서의 기록을 합쳐도 기요하라가 1년 더 하긴 했는데, 둘 다 말년의 성적은 처참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을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